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1. 24. 16:33

의사회는 왜 시작하게 되었는가?

  • 일종의 무력감 때문입니다. 사실 대학교수나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가가 아니고서는 일선 산업보건기관, 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의 근무환경이 그들에게 부여된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많이 열악한 편입니다.

  • 하루에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사람들을 진료실과 현장에서 만나느라, 일터의 문제나 커다란 사회적 과제와 같은 것에 관심 가질 여유도 없는 편입니다. 오히려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외부적 요인들을 바꿔나가야할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개인의 건강에만 집중하다가 점점 일터의 건강에 소홀해지게 되었습니다.

  • 사실, 우리가 만나는 노동 현장은 20년 전 처음 “산업의학과”가 시작되었을 때와 달라진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맨몸으로 일하다 메탄올에 눈이 멀고, 실적이 떨어진다고 네 아이를 두고 자살을 선택하고, 일주일에 60시간을 일해도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류마티즘이 있어도 공장에서 반복노동에 시달리고, 심장에 6개의 관을 박고서라도 야간 경비를 서야 하고, 생활비가 없어 진폐 장애를 가지고도 석산에서 계속 그 일을 해야 하고, 병원을 가는 것도 관리자가 허락해줘야 가능하고, 산재가 나면 보상과 위로는커녕 오히려 회사에서 쫓겨나고, 나를 성희롱한 그 자식과 여전히 마주 보며 일해야 하고, 20년 전에도 큰 탈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똑같이 염색하고 도금을 하고 가공을 하고 세척을 합니다.

  • 의사가 환자를 살리지 못할 때 무력감을 느끼듯이, 이러한 열악한 일터의 현실, 잔인한 노동자의 건강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무력함을 느껴왔습니다. 그동안 무력감을 느끼고 불편감을 느끼는 그 지점에서 멈춰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일터건강을 지켜야할 우리의 존재가치가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환자가 질병이 나아도 의사가 필요없지만,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할 때도 의사가 필요없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 지금의 고민은 우리 의사들이 도대체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멈췄던 그 자리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다양한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의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마음과 머리를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의사회의 시작입니다.

의사회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 구체적인 사업들은 일터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산업보건전문가와 현장에서 건강과 미래, 삶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노동자분들과 함께 만들어갈 예정입니다. 우선은 일터건강영역에서의 건강형평, 전문가적 독립성과 권익, 주체역량 향상을 핵심 목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에게 배타적인 독점권을 준 것은 노동자 건강에 기여하는 특별한 책임을 맡긴 것인데, 현장에서는 생각보다 이 역할을 제대로 하기 힘든 구조입니다. '전문가적 독립성(professional independence)' 은 노동자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첫 번째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장에서의 실무적 역량과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도구를 쓸모있게 다듬는 작업입니다.

  •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의 소통능력과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대화와 학습의 장을 마련하고, 자정노력을 위한 감시단을 운영하여, 회사와 산업보건기관의 가격흥정, 덤핑으로 인한 산업보건서비스의 질적저하와 이로 인해 일터건강은 사리지고 행정업무만 남는 것을 막기위해 노력할 예정입니다.

  • 원칙적으로 산업보건은 모든 노동자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건강을 최고도로 유지, 증진시켜야하는 분야인데, 대한민국에서는 최저를 지키기도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의사들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기업부터 소규모사업장, 도급사업장, 특수고용직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직업군을 아우르는 적정수준의 서비스가 제공되어햐 하고, 산재취약층이 일하는 열악한 사업장일수록 더 많은 관심과 서비스가 제공되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갈수록 산업보건도 민간의 영역, 시장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건강의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기에, 이에 대한 공공의 영역을 확대하는 방안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동안 의사로서 진료실에서는 나름 의미 있는 역할을 해왔지만, 조금 더 나아가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 의사회에서는 일터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건강문제는 단순히 법률위반과 과태료의 문제를 넘어 노동권의 문제, 산재은폐, 해고와 불안정노동 등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해결해야할 과제이기에 그동안 많은 분들의 노력에 의사회가 힘을 더하고 싶습니다.

  • 우리나라는 산업보건과 일반의료체계가 분리되어 있는데, 직업환경의학과 의사회가 의료계에 다양한 방법으로 일터건강의 현실을 알리고 타과 의사들과 일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통로가 되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또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분야이나 회사를 거치지 않고 노동자들을 만날 기회가 오히려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필요한 분들이 쉽게 만나고 상담하고 의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함께 대화해 나갈 예정입니다.